모르는 사람의 장례식

by 김미영 : 서울독립영화제 2022 예심위원

파운드푸티지 영화들은 극영화에서 근래 모큐멘터리 영화들로 기법의 주목을 받았지만, 한편 브루스 코너와 더글라스 고든에서 장뤼크 고다르에 이르기까지 재발견된 영상 편린들로 개인적, 사회적 맥락을 재배치해 온 장르이다. 국내에 하룬 파로키나 켄 제이컵스가 대대적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최근 작품 수가 많아진 파운드푸티지 영화들의 등장을 몇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이미지 기술의 확장과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 이전에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던 자신과 사태들이 아카이브에서 편집 툴 앞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은 시대와 자신에 대한 역사가가 되거나 이미지의 고고학자가 되거나 수집가가 되어 아카이브를 뒤져 시대의 모럴을 묻고있다. (‘아카이브와 모럴’, 고다르 <이미지 북>) 강남역 살인사건, 몰래카메라 비디오, 그리고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시간을 수집하고 자신에게 닥쳤을 수도 있었을 사건들을 복기하고 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한다. 우리 안에 장착되어 버린 고통을 통해 너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문자는 이미지가 되고 문자의 배치와 형상화가 내용과 연결되는 방식을 통해 문자는 공감의 떨림이 된다. 2014년 4월 16일 9시 13분 전후 해경 비행기가 촬영한 푸티지를 가져와서 이 영화는 모두가 무사 귀환하는 다른 평행우주의 꿈을 꾼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아직 살아 있었다. 2022년 참사 이후 우리에게 이 영화 도입부의 만가는 애도 이후의 행동을 요청하는 것처럼 들린다. “죽은 이들을 위해 쉬지 말고 슬퍼하라. (……) 때가 되기 전에 죽은 젊은이를 위해 슬퍼하라. 죽음이 우리를 이승에서 데려가도록 내버려두는 세상을 위해 슬퍼하라.” (폴 오스터) 이 영화는 “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실천”(빌 모리슨)으로 나아가는 것이 왜 시급한 과제인지 이 시대에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