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핑 : 풀밭 위의 점심식사
블러핑 : 올랭피아

A3용지로 벽을 채운 가변설치, 2018

블러핑 : 풀밭 위의 점심식사 / 올랭피아는 A3종이들로 벽을 채운 설치 작품이다. 이 작업에서 작은 드로잉은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확대되어 몸집을 불리고 국제 규격에 맞게 잘려져 전시된다.


서양미술사는 크리스찬, 남성중심주의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다. 여성과 다른 인종들은 전체적으로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캔버스를 차지하고 있는 이 누운 형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녀는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 아니고 창녀라는 것이다. 그녀가 캔버스 앞 관람객들을 똑바로 응시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반항으로 여겨지고, 그 반항이라는 것이 너무나 새로워서, 이것이 미술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배운 미술이다.
여기서 미술이 아닌 상식의 세계로 돌아온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창녀로 추측되는 사람이 관람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해도 반항인 것, 그림에서 벗은 여자는 언제나 여신으로 하기로 정했는데, 그게 아닌것. 이것이 이상한가? 반항인가?

지금 내가 가진 상식에서 이해하면 그동안의 미술계가 자기들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가치를 정한 것, 그것이 모두 허위였고, 나 포함 다른 많은 이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권위적인 그 세계가 결정한 것을 내가 인식하게 된 노트의 낙서, 내가 받아들인 것. 블러핑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왜 항상 나체의 여성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초인간적 존재로 정해져 중요한 미술 작품들에 나타나는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나 풀밭위의 점심식사 에서 보듯이, 당시 모델들이 창녀로 보인다는 이유로 큰 스캔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이 보는 건 그저 나체의 여성이라는 것을.

어째서 나체의 여성들이 작품들에 자주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는가? 이 작품들에 있는 여성들이 그저 귀족들과 부자들의 기품있는 포르노라고 아무도 외칠 사람이 없었던 건가?  누군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지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는 누군가가 말했다고 하더라도 주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편안한 환경과 좋은 교육에서 자란, 당시의 통념에서 조금 더 나아가려고 노력했던 누군가가, 주변 예술가나 그의 친구들의 작품에 대해 썼을 것이다. 그 후 그 누군가의 친구들의 작품들은 예술로서의 정당성을 얻었고, 누군가(평론가)는 미술 작품들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술학도들에게 가르치는 미술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이다.


“리 밀러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맨 레이의 연인이자 뮤즈였습니다. 실제로 만 레이가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찍은 사진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리 밀러가 찍은 사진입니다.” “마네는 자신의 뮤즈이자 당대 인기 모델이었던 빅토린 모랑을 하녀와 함께 창녀로 읽히도록 그렸죠.” 

여성 예술가가 유명 예술가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기뻐해야 할까?

 여성 예술가를 연인, 뮤즈, 창녀로만 지칭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책 Wörterbuch : One and the other are another ‘Bluffing’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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